ㄹ혜와 후배 J.

일상 2017. 3. 14. 01:22

내가 아직 대학을 다닐 2012년 무렵, 동아리에 J라는 후배가 있었다. 뭘 해도 똑소리나게 했던 J는 상당한 박ㄹ혜 빠였다. 정치얘기만 나오면 ㄹ혜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대선에서 ㄹ혜가 당선되었을 때는 "역시 국민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별달리 친해질 구석이 없어 그저 그런 사이로 지내다가 졸업 후에 소식이 끊겼다. 사실 카톡상으로는 아직도 친구지만, 오랜 세월 전혀 대화 없이 지낸 까닭에 이제는 새해 인사 한 마디 하기도 서먹하다.


지난 몇 년 간 ㄹ혜 관련으로 참 많은 사건이 있었다. 나는 간간히 광화문에 가고, 촛불을 들고, 주변인들과 정치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럴 때 가끔씩 "J는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문득 들곤 했다. 카톡으로 물어보면 됐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묻기에 서먹한 관계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예상해봐도 무슨 답변이 튀어나오든 그걸 듣기가 너무 무섭기 때문이 더 컸다.


장장 4년의 시간이 흘러, 드디어, 드디어 ㄹ혜를 내쫓았다. 나는 정말로 울며 뛰며 날듯이 기뻤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J 생각이 났다. J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J는 지금 ㄹ혜가 탄핵당하고 청와대를 나가는 걸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뭐 생각이 있는 아이였으니 일찌감치 생각을 바꿨을까? 아니면 여전히 지금의 박사모와 똑같은 논리를 펴고 다닐까? 혹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며, 한 번 J와 얘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현재 스탠스가 어떻든 간에 말이다. 상당히 격정적인 나로서는, 이런 얘기를 할 때 보통 이것저것 조언을 하기 바쁘거나 맹렬히 비난을 쏟아붓곤 하지만, 유독 J에게만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J 앞에서 잘난척 하겠는가. 애초에 '이쪽 편'에 서 있던 사람으로서 유세떨고 싶지도 않고, 만약 아직 박사모 수준의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비난하며 놀리고 싶지도 않다. 혼란스러워한다고 해서 앞장서서 조언해주고픈 마음도 없다. 그저 그때 어땠는가, 지금은 어떤가. 생각이 변했다면 왜 그렇고, 안 그렇다면 왜 그런가.... 그저 담담히 그런 얘기를 듣고 싶을 뿐이다.


카톡 대화창을 몇 번 열었지만, 결국 물어볼 생각을 접었다. 무서워서라기보다는, 문자로는 대화하기 힘든 주제라 생각해서다. 역시 이런 얘기는 얼굴을 맞대고 해야 한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J와 우연히 마주친 날에, 반가운 마음으로 커피 한 잔과 함께 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해보니 J는 핸드드립도 할 줄 알았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대학시절 J가 내려줬던 맛있는 커피를 또 얻어먹을 수 있을까. 그 생각에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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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림/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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