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018년 1월 1일 첫 트윗은 [2018년을 시작하는 표어:「だからこそ、勝ちたい。」]였다. 러브라이브! 선샤인!! 2기 12화 카난의 대사다. 그리고 적어두진 않았지만,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대사는 「今を、もっともっと楽しみたいから。」이다. 이기고 싶다는 마음이 지금을 즐기도록 해준다는 말, 한 해 동안 항상 기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기긴 커녕 버티기도 힘들었지만, 정신차려보면 꽤 의미있는 한 해가 아니었을까.
1. 사회인 4년차, 가장 풍족한 한 해를 보냈다.
수입도 안정적이었고, 자취생활은 편안했다. 한 해에 일본을 세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라이브 2회, 여행 1회) 여유가 있었다. 중견기업 이상 다니는 친구들이라면 푼돈으로 취급할 정도의 연봉이지만, 이 일로, 내 능력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조금 생겼다. 이제 입에 풀칠은 가능하다. 이제 문제는 남는 게 없는 것이니, 다음 단계로 효과적인 저축 계획을 고려해야 되겠다.
2. '일용할 양식'의 '일용'의 범위가 어디까지가 항상 궁금하다. 나는 신께 어디까지 간구해야 하는 것일까. 내게는 어디까지 허용되어 있는 것일까. "까짓거 돈 없으면 없는 대로 살지 뭐"라고 생각했던 학생 시절의 내가 있었다. 플랜A나 플랜B의 2배 이상을 벌고 있는 지금도 부족한 것 투성이인데, 그때의 나는 용감했던 걸까 아니면 무식했던 걸까. 지금의 나는 겁을 먹은 걸까 아니면 뭘 좀 알게 된 걸까. 나는 여전히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3. 수영은 빠지는 날이 늘었으나 어쨌든 가고 있다. Aqours 4th 라이브 전후로 바쁘고 아파서 거의 못 갔는데, 조금 불안해져서 허리가 아프지도 않은데 물리치료를 받곤 했다. 주3회 운동의 원대한(?) 꿈은 점점 멀리 날아가지만, 이틀은 어떻게든 사수해야지.
4. 예나 지금이나 한 달에 적어도 두 권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목표지만, 일이 바빠지고 서브컬쳐 덕질에 힘쓰다 보니 점점 독서에 손을 놓게 된다는 걱정이 있다. 올 한 해 읽은 책이 별로 없다. 정확히 세지는 않았지만 아마 작년 독서량의 절반 이하일 것인데, 그마저도 기억에 남는 게 그다지 없다는 건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작년만 해도 「정통」이라던가 「오독」, 「한나의 아이」 같은 충격적인 책들이 내 옆에 있었다. 그에 비하면 올해에는... 읽기 전 잔뜩 기대했던 래리 크랩의 「행복」은 지루하고 형편 없었으며, 「특강 이사야」는 성경 본문을 보지도 않고 주석서를 읽어내려는 태도와 JLPT를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만 중도에 손을 놓아버렸다. 그 외 신학서적 중에서도 마음에 남는 책은 없었다. 그나마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아픔이 길이 되려면」 같은 일반 교양서적들이 특정 주제에 대한 기존 인식을 조금 바꾸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19년도는 책 많이 읽어야지.
5. 신중함, 철두철미함, 섬세함을 지향하는 성격이건만,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지나친 진지함, 까탈스러움, 민감함으로 보일 때가 적지 않다. 나는 내가 지향하는 바가 반드시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후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내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주제가 무엇이든 화를 낼지언정 대화를 포기하지는 않기를 나 자신에게 바란다.
6. 멘토가 죽었다.
이것이 올해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큰 일인데, 물론 그는 지금도 생물학적으로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저 내게 멘토로서의 가치가 끝난 것이다. 오랜 세월 "그를 존경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제는 생각조차 하기 꺼려진다. 이렇게 뒤돌아서는 것은 얼핏 순식간의 일 같지만, 생각해 보면 실은 그 전부터 그 사람의 실체를 체험하고 실망하는 과정이 반복되어 온 것이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간간이 드러나는 그의 추한 모습을 정상참작('에이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어!')이라는 명목 아래 포장해 왔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꽤 화기애애하게 끝났지만, 내가 그 사람에게 가졌던 최후의 기대, '그래도 좋은 의도가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라는 생각은 완벽하게 박살이 났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제는 그의 말이 진심인지 믿을 수 없다. 설령 진심이라 하더라도, 그의 사고방식·행동양식이 그가 하는 말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뭐, 사람이 스스로를 착각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히틀러도 자기 나라는 잘 되기를 바랐고, 윤서인도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여긴다. 여하튼 나는 저렇게 이기심과 자아과잉의 표상이 되기는 싫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7. 어쨌든 멘토는 죽었고, 그의 꿈은 더 이상 내 꿈이 아니며, 나는 내 꿈을 나 혼자 품고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2019년에도 그 꿈들을 키우고, 다듬으며 시간을 보내겠지만, 지금까지의 시간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긴 세월간 믿어왔던 정답이 또 하나 부재하게 된 오늘, 고개를 돌려보니 컴퓨터 옆 코르크 보드에 붙여둔 하우어워스의 글이 보였다.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내게 지독히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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